현재위치 : Home > 씨름의 역사

상고시대 | 삼한시대 | 삼국시대 | 고려시대 | 조선시대 | 근대 | 현재 | 경기기록

<스포츠로서의 근대화>

소규모의 지역적인 지방 씨름이 성행되다가 1912년 10월 유각권 구락부의 주관으로 서울 단성사 극장에서 대회다운 면모를 갖춘 씨름대회가 처음으로 개최되는 것을 비롯하여 1915년 1월 서울 광무대 극장 주최로 그 극장에서 4주일 동안 씨름대회가 열리었다.
그후 씨름에 대한 점점 높아지는 열기와 관심은 1927년 조선 씨름 협회가 창단되면서 1927년 [ 제 1회 전조선 씨름대회]를 휘문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이 대회에서는 고등학교 단체전과 개인전을 구분하여 경기를 가지며 회가 거듭될수록 더욱 발전하는듯 했으나 1934년 11월 제 6회 대회가 최종대회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2년후인 1936년 조선 씨름협회에서 다시 [ 제 1회 전조선 씨름선수권대회]를 조선 일보사 강당에서 개최하였다. 첫 대회에 100 여 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면서 1941년 제 6회 대회를 마친후 중단되었다가 1946년 대한 씨름협회로 협회 명칭을 바꾸며 다시 재건을 보게 되어 1947년 "전국 씨름선수권대회"가 7회부터 계속되기 시작하였다. 이대회는 1998년 현재 제 52회를 개최하였다.
일제 치하에서의 한국인들은 큰 씨름 대회를 주최할 능력이 없었으며, 권한이 주어지지도 않았다. 다만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대개 일본인 신문사의 주최로 잔치 형태의 씨름 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가 열리게 되면 입장료를 받고, 간이음식점을 허가 해준 댓가 등으로 상품을 구입하여 1등에게는 황소 1마리, 2등에게는 송아지, 5등까지 쌀, 광목 등의 상품이 주어졌다. 어떤 지역에서는 1등에게만 소를 주어 1등과 2등간의 상금 격차가 매우 컷다고 한다. 씨름 경기장은 요즈음 경기장 보다 두배 가량 큰 모래판을 사용하였으며, 주위에 나무로 상사(특별 관람석)를 만들어 관람하기도 했다.
경기를 할 때 각각 흑백의 샅바를 매고 앉아서 샅바를 잡았는데 샅바 싸움이 별로 없었으며 양 선수 모두 무릎이 땅에서 떨어지기만 하면 호각을 불어 경기 시작 신호를 하였다. 시합 기간은 보통 5일간 계속되었으며, 3사람을 이겨야 비교를 통과하는 즉, 본선에 출전할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대체로 120명 정도가 본선에 진출하여 토너멘트에 의한 경기방식으로 우승자를 결정하였는데 승부는 5판 3승으로 가렸으며 경기를 하는 시간 제한이 없어서 몇시간씩 한게임이 연장되기도 했다고 한다. 심판은 순수한 씨름인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고 일본인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는 다른 스포츠 선수 출신 등을 시켰다. 물론 이들은 한국인들이었지만 씨름을 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심판을 하는데 있어 문제점이 많았다. 그러나 심판의 권위가 대단하여 항의를 하거나 불만을 나타낼 수없었다. 이 시기에 많이 사용한 기술로는 왼 배지기, 안다리 걸기, 앞무릎치기, 등치기, 밧다리 걸기, 차돌리기, 덧걸이 등 오늘날 선수들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기술이 존재하였다.
큰 도시에서 연 1~2번, 지방에서도 1번 정도 큰 대회가 열렸으며, 면소재지 정도의 시골 씨름 대회는 지서(현 파출소)에 신고를 하면 벌릴 수 있는 난장판 씨름 대회였다. 경기 사이 사이에는 우승할 때마다 기생들의 지화자 타령에 장고춤 등이 곁들여 지기도 했으며, 우승자는 상품으로 탄 황소를 타고 시내를 일주 한 후에는 팔아서 후배나 타 지방에서 온 우수 선수들에게 상금을 나누어 주는 등 정이 흐르고 멋이 있는 전통이 있었다. 야구, 축구, 정구 등의 딴 대회도 개최되었으나 관중이 별반 없었고 씨름은 대단한 인기가 있어 인산 인해를 이루며 상사가 내려앉은 일화도 있었다고 한다.
선수들은 평소에 연습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특별히 영양식을 하지도 못했다. 시합전 생계란 몇개 먹고 나오는게 고작이었으니 천부적인 힘과 소질을 타고 나야 했던 시대라고 보아진다.
씨름경기는 기본 방식에 있어서 전국적으로 공통성을 가지고 있으나 씨름 형태에 있어서는 지방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며 씨름과 관련된 풍속도 지방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이 글은 라윤출씨가 쓴 "조선의 씨름"책에서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 가능한한 원문의 내용을 충실히 따랐다.
서울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씨름 경기가 진행되는데 오른 씨름과 왼 씨름 두가지 모두 통용되었다.
오른 씨름이란 샅바를 왼 다리에 걸어 매고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다리 샅바를 쥐며 왼쪽 어깨를 대고 하는 씨름을 말한다. 왼 씨름은 오른 씨름과 정반대로 쌍방이 어울리는 씨름을 말한다. 과거 서울에서 진행된 전 조선 씨름 대회(1927년 제 1회 전 조선 씨름대회 : 휘문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는 오른 씨름과 왼 씨름을 따로따로 진행시켰다.
평양은 평안도 씨름의 중심지였다. 평양 씨름은 된 샅바 걸이와 망걸이 식으로 경기가 진행되었으며 음력 5월 단오 놀이때 여성들의 그네 타기와 병행하여 진행하는 풍습이 있었다.
된 샅바걸이란 샅바 길이가 1m 정도이며 샅바를 오른 다리에 걸고 팔을 빡빡하게 끼우도록 샅바를 여러번 꼬아 가지고 끼운 후 오른손과 왼팔로 상대를 붙잡고 진행하는 씨름 형태이다. 망걸이란 샅바의 길이가 된 샅바의 경우와 같은 정도인데 샅바를 잡을때 오른편 손으로 상대방의 허리 중추를 지나서 오른 다리 샅바를 한 두번 감아서 틀어 쥔다. 그러면서 왼 손을 상대방의 불두덩 밑에 넣어 샅바의 다른 한 끝을 잡고 일어서서 씨름하는 형태인바 이 방식은 체력이 약한 편에 지나치게 불리한 단점을 가지고 있다. 황해도 지방에서는 개량씨름 방식을 적용한다. 음력 4월 8일 또는 4월 단오날에는 큰 씨름 놀이가 벌어지며 그네타기 경기도 이에 병행된다. 때로는 음력 9월 9일 국화절에도 큰 씨름이 벌어진다.
씨름 대회는 농민들이 부근 동네에 운집하여 농악을 울리며 피리를 불어 흥미를 돋군다. 씨름의 우승자와 그네의 우승자들에게는 기묘하게 그린 탈을 얼굴에 씌워준다. 탈을 쓴 우승자들이 군중과 함께 어울려 군중 무용이 벌어진다. 또 어떤 사람은 머리에 호랑이 탈을 쓰고 몸에 호랑이 가죽을 입고 양반들의 횡포와 진부한 행동을 질책하는 "호랑이 꾸중" 놀이로 양반을 풍자하며 군중의 환호와 절찬의 폭풍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황해도 송림 씨름에서는 최우승자 외에 모범경기에서 다수를 이겨낸 자에게도 농우를 상품으로 주는 특상 제도가 있었다.
황해도 씨름에서 개량씨름이란 다리 샅바 길이를 80cm로 하고 왼손을 상대의 다리 샅바에 끼우지 않고 다만 두가닥을 모아 잡으며 오른 편 손으로 상대방의 허리 샅바를 잡되 상대방의 허리 중추 이상을 넘어가지 않게 하는 형태이다. 이 쌍방이 모두 몸을 자유 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지는 방식이다. 경상북도의 대구와 김천, 경상남도의 부산과 김해는 가장 큰 씨름 중심지였다.
경상북도에서는 지방적 씨름 풍습에 있어서 여러가지 특수한 점이 많은데 경북 현풍과 경남 창령에서 그의 실례를 보기로 한다. 현풍과 창녕 근방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날과 2월에 씨름 놀이가 벌어진다. 인근 부락 사람들은 제물을 성황당 고목 밑에 차려놓고 농악을 울려 풍년과 평안을 축원한 후 부락별로 나누어서 씨름을 진행했다. 단체전도 하며 개인전도 하는데 특히 개인전은 열기가 대단하였다.
2울에는 각 마을 농민들이 선수를 앞장에 세우고 씨름판에 운집하여 농악과 춤으로 한바탕 친선적 오락을 하여 경기 분위기를 돋군후 씨름을 진행한다. 승리한 마을의 군중들은 왜적을 물리치던 옛날 전쟁시기의 민요인 "쾌지나 칭칭나네"노래를 격앙된 기세로 장쾌하게 부르는데 노래 소리는 산과 들을 뒤흔든다.
여름철에는 풀베기 자리가 좋은 구역과 좋지 않은 구역을 씨름의 승패로써 쟁탈하는 경기가 진행된다. 씨름 경기에서 승리한 마을 농민들은 풀많고 운반하기 좋은 풀밭을 가진다. 또한 경상도에는 씨름의 승패로서 논에 물대기를 먼저하는 것을 결정하는 풍습도 있다. 이 경우에 이긴 편이 자기들의 논에 물을 먼저 댄다.
함경도에서도 다른 지방들과 같이 씨름 경기가 흔히 5월 단오에 진행되며 이때에 그네타기 경기도 병행된다. 함경도에서는 일년치고 5월 단오에 하는 씨름이 가장 이른 씨름이고 가장 늦은 씨름으로서는 8월 추석 씨름이 있다. 또한 함경도 지방에서는 밤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씨름을 하는 풍속도 있다. 함경도 씨름에서는 느즌 샅바를 걸고 경기를 진행한다. 느즌 샅바 씨름이란 약 1m 길이의 샅바를 상대의 오른 편 다리에 걸고 오른팔을 샅바에 끼우데 샅바를 꼬지 않고 느지막하게 끼운채 진행하는 씨름 형태이다. 느즌 샅바를 끼우고 하기 때문에 비교적 기술을 다양하게 발휘할 수 있으며 된 샅바걸이 씨름이나 망걸이 씨름보다는 상대로부터의 힘의 제약을 적게 받는다. 그러나 이 씨름 형태도 경기자들의 키가 고르지 않을 때에는 어느 한 편이 불리하게 되는 단점이 있다.
충청남북도 지방에서는 견우 직녀가 일년에 한 번 상봉한다는 전설의 날인 7월 칠석 날에 그 해의 씨름이 시작되어 오늘은 이 지방 내일은 저 지방 이렇게 지방마다 씨름이 진행되어, 도 전체로 보면 8월까지 씨름이 계속되는 특징이 있다. 충청도 씨름에서는 대전, 천안, 청주 지방 씨름들이 큰 씨름판이다. 충청도에서 씨름판이 벌어지기 전에 운집한 군중들이 장쾌한 농악과 군중 무용으로 한바탕 오락을 진행하는 풍습이 있다. 특히, 대전에서는 통씨름을 했는데 이 씨름은 허리에만 샅바를 매는 것이 특징이다. 전라남북도의 지방 씨름도 7월 칠석날부터 시작되어 여러곳에서 뒤를 이어 씨름이 진행되어 오다가 9월에 이르러서야 끝난다.
전라도는 민요와 기악이 비교적 대중적으로 보급된 지방적 특성이 있어서 다른 지방들에서 보다 음악 연주가 더욱 다채로웠다. 전라남북도 씨름은 왼씨름과 오른 씨름의 두 방식을 겸하여 경기자들이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가는 추첨으로 결정했다. 전술한 씨름의 지방적 형태들 이외에 경주 지방에서는 홀치기 씨름이란 것이 있었다. 이것은 약 25년(1933년)전부터 없어지고 말았다.
과거 조선 씨름은 흔히 농촌에서 모내기나 김매기가 끝났을 때, 또는 추수가 끝났을 때 농민들이 자기들의 성과를 경축하는 놀이였다. 씨름에서 최우승을 한 사람에게는 농우를 상으로 주었다. 씨름에서 이기라고 고무하는 말을 "소를 따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최우승자는 상으로 받은 농우를 타고 돌아가는데 소의 목에는 승리를 축하하여 꽃으로 엮어 만든 목걸이를 건다. 즉 흔히 말하는 꽃소를 타고 돌아가는 것이다. 씨름판이 벌어지는 동안에는 줄곧 농악이 울리었으며 농악에 맞추어 농무도 벌어졌다. 농악과 농무는 최우승자가 꽃소를 타고 돌아 갈때까지 계속되었다.
체급이 처음으로 나누어진 것은 1956년 [제 12회 전국 씨름 선수권대회]였는데 선수들의 체급을 중량급(71.3kg 이상)과 경량급(71.3kg이하)으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두 체급 역시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특히 중량급에서는 체중차이가 너무 많은 사람끼리 경기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비과학적이라는 점에서 1967년부터는 소장급(60kg 이하), 청장급(67.5kg 이하), 용사급(75kg 이하),역사급(82.5kg 이하), 장사급(82.5kg 이상)의 5체급으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다시 1975년 부터 경량급(70kg이하), 中량급(80kg 미만), 重량급(80kg 이상)의 3체급으로 바뀌어 지게 되었다.
1959년 6월 한국일보사와 대한 씨름협회가 공동 주최한 [제 1회 전국 장사 씨름대회]는 1963년 9월 제 6회까지 계속되었으나 선수권의 종결을 짓지 못하고 대회 자체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 대회는 상장과 황소를 부상으로 수여하였다. 그 후 [대통령기 쟁탈 전국 장사씨름대회]와 [회장기 전국 장사씨름대회]가 개최 되기 시작하였다. 1972년 9월에는 KBS 방송국과 대한씨름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1회 KBS배 쟁탈 전국장사씨름대회가 장충체육관에서 3일 동안 펼쳐졌는데 씨름의 발전에 획기적인 공로를 세운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프로씨름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된 대회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전통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그 당시 KBS 국장인 최창봉(崔彰鳳)씨의 노력으로 창설되었다. TV로 전국에 중계방송 되었으며 매일 1만 여명의 관객으로 꽉 차는 등 씨름에 대한 열기가 한층 높아진 것이었다. 그 당시 우승자에게 준 상금 100만원은 대단한 액수였으며(350kg 숫소 1마리가 15만원대), 선수들에게 가운을 착용하게 하는 등 이전과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출전한 선수들은 주로 학생들이었고 소속학교를 홍보하는 큰 역할을 하였다. 70년대에 가장 유명한 씨름선수는 김성률 장사다. 대통령기 8연패(70~77), KBS배4연패(72~75) 선수권대회5회 우승등 70년대 씨름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하였다.